자동차 산업의 반도체 패러다임이 급격히 변하고 있다. 과거 단일 칩으로 모든 기능을 수행하던 방식에서,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반도체 조각들을 연결해 성능을 극대화하는 ‘칩렛’ 기술이 새로운 주류로 부상한 것이다. 이 변화의 속도를 가늠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지표는 세계 최대 반도체 연구소인 아이멕이 주도하는 차량용 칩렛 협력체 참여 기업의 급격한 증가세다. 불과 1 년 반 사이에 참여 기업이 10 개에서 22 개로 두 배 이상 불어났으며, 이는 해당 기술이 실험실 단계의 아이디어를 넘어 산업 전반의 필수 인프라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러한 생태계 확장의 배경에는 자율주행과 첨단 운전자 지원 시스템의 고도화가 자리 잡고 있다. 최근 차량에는 단순한 주행 제어를 넘어 대규모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연산해야 하는 인공지능과 고성능 컴퓨팅 모듈이 필수적으로 탑재되고 있다. 단일 칩 설계로는 이러한 막대한 연산 능력을 효율적으로 구현하기 어려워졌고, 각 기능을 최적화한 칩들을 패키징으로 결합하는 칩렛 아키텍처가 비용과 성능 면에서 가장 현실적인 해법으로 떠올랐다. 아이멕 측은 머지않아 모든 차량에 슈퍼컴퓨터급 성능이 탑재될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칩렛 방식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참여 주체의 다양성 또한 주목할 만하다. 아우디, BMW, 폭스바겐, 포르쉐, 리비안 등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이 앞다투어 합류한 것은 물론, 보쉬, 발레오, 지멘스 같은 주요 전장 부품사까지 생태계에 포함되었다. 특히 반도체 설계 자동화 도구 개발사나 외주 패키징 및 테스트 전문 기업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칩렛 기술의 전 주기를 아우르는 협력망이 완성되고 있다. 국내 기업 중에서는 LG 전자가 유일하게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글로벌 흐름에 발맞추고 있으며, 최근에는 L&T 테크놀로지 서비스와 실리콘박스까지 합류하며 생태계의 밀도를 더욱 높였다.
이제 자동차 산업에서 칩렛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전략이 되었다. 각 기업들이 특정 기능에 특화된 칩을 개발하고 이를 유연하게 결합함으로써, 차량 제조사들은 다양한 애플리케이션 요구에 맞춰 비용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게 됐다. 앞으로는 이 협력체가 단순한 기술 표준화를 넘어, 실제 양산 차량에 적용되는 구체적인 아키텍처를 어떻게 정의해 나갈지가 관건이 될 것이다. 자율주행 레벨이 높아질수록 칩렛 기반의 모듈형 반도체 설계가 얼마나 빠르게 상용화될지, 그리고 국내 기업들이 이 흐름 속에서 어떤 경쟁력을 확보해 나갈지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