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게임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플레이어의 입력에 따라 화면 속 캐릭터가 반응하는 구조가 당연시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인간-컴퓨터 상호작용(HCI) 분야 최고 권위 학회인 ACM CHI 2026에서 이 관념을 뒤집는 연구가 주목받으며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산업디자인학과 이창희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식물이 플레이하는 게임’ 관련 논문이 최우수논문상(Best Paper Award)을 수상한 것이다. 전체 제출 논문 6,730편 중 상위 1%만이 선정되는 이 상은 단순한 기술적 성과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 존재 간의 새로운 상호작용 방식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번 연구의 핵심은 식물을 게임 시스템의 수동적 요소가 아닌 능동적인 행위 주체로 재정의한 점에 있다. 기존에 식물이 디지털 환경에 도입될 때는 주로 주변 환경을 감지하는 센서 역할이나 시각적 장식에 그쳤으나, KAIST 연구팀은 식물의 생체 신호, 환경 데이터, 그리고 낮과 밤에 따라 반복되는 일주기 리듬을 게임의 핵심 변수로 활용했다. 식물의 상태 변화가 직접적으로 게임 속 캐릭터의 형태나 행동을 결정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습도가 낮은 환경에서는 식물이 디지털 펫에게 햄버거를 제공하여 성장을 돕는 식의 상호작용이 구현되며, 식물의 고유한 성장 속도와 패턴이 게임 진행의 리듬을 이끈다.
사용자의 참여 방식 또한 기존 게임 경험과 확연히 달랐다. 플레이어가 키보드나 마우스로 캐릭터를 직접 조종하는 대신, 식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게임에 몰입하게 된다. 실제 전시 환경에서 진행된 사용자 연구 결과, 참가자들은 식물의 느리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하나의 놀이로 받아들이며, 식물과 가상 캐릭터 모두에 정서적으로 공감하고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인간이 기술과 교감하는 방식이 단순한 조작을 넘어 정서적 유대와 공감을 중시하는 ‘어태치먼트 이코노미’ 시대로 확장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변화는 향후 디지털 콘텐츠와 일상 생활의 경계를 허무는 중요한 신호탄이 될 전망이다. 이창희 교수는 이번 연구가 AI, 로봇, 동물, 식물 등 다양한 비인간 존재와의 교감이 중요해지는 미래 사회를 선제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설명했다. 인간 중심의 상호작용에서 벗어나 생태계 전체를 아우르는 새로운 디지털 경험의 가능성이 열렸다는 점에서, 앞으로 식물을 매개로 한 인터랙티브 아트나 게임, 그리고 스마트 홈 환경의 진화 방향을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