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동차 시장은 오랫동안 외국인 브랜드에게 ‘금지된 땅’ 혹은 ‘무덤’으로 불려왔다. 토요타, 혼다, 닛산 등 국내 브랜드가 신차 판매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이 시장에서 외국산 차량이 성공적인 발을 내딛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기아가 최근 일본 모빌리티 쇼를 통해 자사의 첫 전기차인 PV5 를 공식 출시하며 이 금기를 깨뜨리는 ‘본격적인 공세’를 선언했다. 이는 단순한 신차 출시를 넘어, 일본 완성차 업체들이 하이브리드 위주로 전환을 미루는 사이 전기차 시장 공백을 선점하려는 기아의 전략적 도박으로 해석된다.
기아가 선택한 무기는 상업용 밴인 PV5 이다. 이 차량은 일본 시장의 특수성을 깊이 고려하여 설계되었다. 좁은 도로 사정을 반영해 전장 4,695mm, 전폭 1,895mm 의 컴팩트한 크기를 유지하면서도 회전 반경 5.5m 로 도심 주행에 최적화했다. 특히 일본에서 여전히 표준으로 통용되는 CHAdeMO 충전 방식을 기본으로 탑재한 점은 현지 경쟁력을 높이는 핵심 변수다. 기존 일본 전기차 시장이 상업용 분야에서 선택지가 매우 제한적이었던 점을 역이용하여, 기아는 PV5 를 통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현재 기아는 PV5 패시너 5 인승과 카고 모델을 먼저 판매에 돌렸으며, 곧 7 인승 패시너와 휠체어 접근형 차량(WAV) 등 다양한 라인업을 추가할 예정이다. 이는 일본 내 상업용 전기차 수요를 세분화하여 공략하겠다는 의도다. 일본 정부가 2030 년까지 신차 판매의 30% 를 전기차로 전환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상황에서, 기아의 이러한 공격적인 행보는 일본 내수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특히 일본 기업들이 전기차 전환에 소극적이었던 틈을 타, 기아는 기술력과 제품 경쟁력을 앞세워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추고 있다.
앞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2028 년 출시 예정인 대형 전기 밴 PV7 의 행보다. PV5 로 시장 진입을 성공적으로 이끈다면, 기아는 일본 내에서 상업용 전기차 시장을 주도하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단순한 수출 확대를 넘어, 일본 자동차 산업의 구조적 변화와 글로벌 브랜드의 공존 가능성을 시험하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기아가 일본이라는 ‘금지된 땅’에서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게 뿌리를 내릴 수 있을지, 그리고 일본 완성차 업체들이 이에 어떻게 대응할지가 향후 모빌리티 시장의 큰 흐름을 결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