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국이 원유 공급을 늘리겠다고 발표하면 국제유가가 하락한다는 경제학의 기본 상식이 최근 시장 흐름에서 통하지 않고 있다. 아랍에미리트가 5 월 1 일 OPEC 및 OPEC+ 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생산량 증대를 예고했음에도 브렌트유와 WTI 선물가는 오히려 상승세를 보였다. 이는 공급 증가에 따른 가격 하락 논리를 뒤집는 이례적인 현상으로, 호르무즈 해협의 지정학적 리스크가 시장의 핵심 변수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세계 원유 수송의 약 20% 를 담당하는 호르무즈 해협이 사실상 봉쇄된 상태라, 산유국이 생산량을 늘리겠다고 약속해도 실제 원유가 시장에 유입되지 못하고 있다.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는 단순한 물류 차원을 넘어 OPEC 의 시장 안정화 역할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1960 년 결성 이후 OPEC 는 회원국들의 생산량을 조절하며 유가를 관리해 왔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유가가 급락할 때 생산을 줄여 가격을 지지하는 안전판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러나 이번 이란 전쟁 국면에서 사우디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작전에 협력하지 않았고, UAE 는 사우디와의 관계 악화를 탈퇴 명분으로 삼으며 카르텔 내부의 균열이 가시화되었다. 핵심 3 대 산유국 중 하나인 UAE 가 이탈하면서 OPEC 회원국은 11 개국으로 줄었고, 사우디가 단독으로 시장을 지탱하던 과거의 구조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과거 중동 분쟁 당시에는 전쟁 발발 초기 유가가 급등하고 증시가 하락했으나, 휴전 합의나 전쟁 종료 소식이 들리면 시장이 빠르게 안정을 찾으며 반등하는 패턴을 보였다. 1991 년 걸프전이나 2003 년 이라크전 때도 OPEC 이 가진 안전판 기능이 작동하여 시장이 방향성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이란 전쟁 국면에서는 휴전 합의가 이뤄졌음에도 호르무즈 해협이 열리지 않아 유가가 다시 120 달러에서 130 달러를 상회할 것이라는 JP 모건 등의 전망이 나오며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안전판 역할을 하던 사우디의 영향력이 약화되면서 시장은 다음 방향을 잡지 못한 채 여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자산 간 상관관계를 설명하던 기존 투자 공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식, 부동산, 코인 등 자산군마다 반응하는 경제 변수가 달라 분산투자가 위험을 줄이는 전략으로 통용되어 왔으나, 지정학적 변수가 시장을 좌우할 때는 이러한 상식이 무너진다. 유가라는 단일 변수가 전 자산군에 파급 효과를 일으키면서 자산 간 분산 효과는 희미해졌다. 향후 카자흐스탄, 나이지리아, 베네수엘라 등 추가 이탈 가능성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OPEC 의 균열이 얼마나 확대될지에 따라 글로벌 시장 구조는 근본적인 재편을 겪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