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염병의 확산 속도가 빨라지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여러 병원체를 한 번에 정확하게 식별하는 것이다. 기존 진단 기술은 다양한 바이러스를 동시에 검출하기 위해 서로 다른 유전자 가위를 사용하거나 복잡한 형광 물질을 도입해야 했다. 이는 검사 과정을 길게 만들고 현장 적용을 어렵게 하는 주요 원인이었다. 하지만 최근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손성민 교수 연구팀이 미국 UC 버클리 및 글래드스톤 연구소와 공동으로 개발한 새로운 기술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우아하게 해결했다.
이 기술의 핵심은 유전자 가위 단백질인 Cas13의 반응 속도를 조절하여 정보를 얻는 데 있다. 연구팀은 유전자 가위가 목표 RNA와 결합할 때, 바이러스의 종류에 따라 가위질을 수행하는 속도가 각기 다르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주 작은 물방울 안에서 단일 분자 단위로 관찰한 결과, 가이드 RNA와 표적 RNA의 조합에 따라 고유한 반응 속도 패턴이 생성됨을 확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연구팀은 반응 속도 차이를 일종의 바코드처럼 활용하는 키네틱 바코딩 기술을 완성했다.
이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확장성과 단순함이다. 색이나 추가 장비를 더하지 않고도 단 하나의 유전자 가위만으로 여러 바이러스와 변이를 동시에 식별할 수 있다. 가이드 RNA 설계를 조정하면 반응 속도를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어 이론상 매우 다양한 병원체를 한 번의 반응으로 판별할 수 있다. 또한 RNA를 DNA로 변환하는 역전사 과정을 생략하고 RNA를 직접 검출할 수 있어 검사 시간이 단축되고 절차가 간소화된다. 실제 임상 샘플 테스트에서도 다양한 호흡기 바이러스와 SARS-CoV-2 변이를 정확하게 구분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연구는 단순한 기술 개선을 넘어 진단 플랫폼의 차세대 방향성을 제시한다. 유전자 가위의 반응 속도라는 새로운 정보를 진단에 활용한 첫 사례로 평가받으며, 향후 신종 감염병이 출현했을 때 현장에서 즉각적이고 정확한 대응을 가능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네이처 바이오메디컬 엔지니어링에 게재된 이번 연구 결과는 감염병 대응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